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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시대별 척(尺)의 길이 변화

시대별 척(尺)의 길이 변화

우리나라 사서나 중국 사서를 읽다보면 폭, 길이, 거리를 재는 단위로 척(尺)과 리(里)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30cm와 0.4㎞를 대입하여 대략적으로 그 크기를 생각하면서 지나친다. 이렇게 하다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이는 같은 용어를 쓰더라도 시대마다 그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크기,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 것은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크기를 재고 들어보고 무게를 재는 신체를 이용한 척관법은 아마 인류의 발생과 그 역사를 같이했을 것이다. 크기를 재는 도구로써 가장 편리한 방법이 사람의 신체를 이용한 방법이다.

 

사람의 손가락 마디 길이,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최대로 벌렸을 때의 길이, 한 걸음의 길이를 이용했다. 2cm내외의 손가락 한마디를 1촌(寸)이라 했고, 20cm내외의 한뼘을 1척(尺)이라고 했으며 120cm내외의 한 걸음(왼쪽 또는 오른쪽 발이 다시 지면에 닿을 때까지의 거리)을 1보(步)라고 했다. 그 크기는 시대마다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신체척관법은 고대로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보이지만 한자가 발견된 이후 주나라에서 사용하였다고 하며 오늘날 우리는 당시 척도를 주척(周尺)이라고 부른다. 주척도 시대마다 그 크기가 다르다. 한국의 문화는 중국 대륙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래 전부터 중국에 그 기원을 둔 척관법을 사용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우리 고유의 것으로 개발 사용하였다.

 

중국 역대 척도(尺度)의 길이 변화

중국의 시대별 1척의 길이는 약간씩 오차는 있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단위로는 1척(자) = 10촌(치) = 100분(문)이 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장(丈)이라는 척도가 나타나는데 1장은 10척이다. 근세로 올수록 척의 길이가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주(周):19.1cm
  • 전국(戰國), 진(秦), 한(漢): 23.1cm
  • 삼국(三國), 서진(西晉): 24.2cm
  • 동진(東晋), 16국, 남조(南朝): 24.5cm
  • 북조(北朝):29.6cm
  • 수(隨), 당(唐): 소척 24.6cm, 대척 29.6cm
  • 요(遼), 금(金): 30cm
  • 송(宋), 원(元): 31.25cm
  • 명(明): 재의척(裁衣尺)34cm, 양지척(量地尺) 32.7cm, 영조척(營造尺) 32cm
  • 청(淸): 재의척(裁衣尺)35.5cm, 양지척(量地尺) 34.5cm, 영조척(營造尺) 32cm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척도(尺度)

삼한시대(三韓時代)는 기록이 없어 어떤 척을 사용한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형성 시기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한대(漢代) 이전에 여러 종족들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한 때이고 이들은 아마 주척(周尺) 또는 한척(漢尺)을 사용했을 것이다. 삼한 초기에는 이주민들이 토착민과 융화되면서 이러한 척도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삼한시대에 어떤 척을 사용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사회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280년대에 편찬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거리나 길이를 재는 척도로 리(里), 보(步), 장 (丈), 척(尺), 촌(寸), 분(分)을 쓰고 있다.

 

이 책에서 거리의 크기에 대해 추정 가능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방)군에서 나아가 '왜'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야한국'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라고 한다. 일부 이설은 있지만 대방군의 치소를 황해북도 사리원시로 보고 있다. 구야한국을 김해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수로로 이 두 곳의 거리는 약 850㎞이다. 대방군에 속한 해주에서 출발한다고 했을 경우에는 200㎞ 정도가 단축된 약 650km이다. 1리는 121m 또는 93m가 된다.

 

'처음 하나의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도'에 이른다.'라고 한다. 대마도는 길이가 70km나 되는 긴 섬이다. 종점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큰 오차가 발생한다. 김해에서 출발할 경우 해류의 영향으로 대마도 상도 동쪽 해안에 도착하게 된다. 좌수포(사스나)는 천혜의 항만을 갖추고 있어 접안이 쉬운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곳을 경유한다고 할 때 김해에서 이곳까지 약 90km이다. 1리는 90m가 된다.

 

'그 큰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는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므로 떨어진 섬은 하도를 말하는 것 같다. 대마도는 대부분 산악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가장 넓은 평지가 있는 곳은 하도의 엄원(이즈하라)이다. 비구라고 하는 대마도 도주(島主)는 이곳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좌수포(사스나)에서 엄원(이즈하라)까지 약 35㎞이다. 1리는 약 88m가 된다.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해'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 모리'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큰 나라는 이키섬(壱岐島)을 말하고 종점은 이 섬의 지국왕도가 있는 곳이다. 엄원(이즈하라)에서 여기까지 거리는 약 90㎞이므로 1리는 90m가 된다.

 

이 네가지 기록에서 물론 오차는 발생할 수 있지만 1리(里)는 대략 90m 정도가 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리의 길이가 지나치게 짧아 전통적인 척의 길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리(里), 보(步), 척 (尺)의 관계도 설명할 수 없다.

 

보(步)에 대해서는 '비미호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장(丈)에 관한 기록으로는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푼(分)에 관해서는 '겨울에 돼지비계를 몸에 바르는데 두께가 수 푼이다(冬以豬膏塗身厚數分)'라고 한다. 보(步), 장(丈), 푼(分)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그 크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척(尺)과 촌(寸) 길이에 대해 추정 가능한 기록을 살펴보면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든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 팔촌이다.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그 남쪽에 '주유국'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으로 '여왕국'에서 사천여 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화살의 적정크기는 말의 길이에 따라 다른데 양팔을 벌렸을 때의 길이(키의 크기)의 2/5가 적합하다고 한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키가 160cm이라면 64cm가 된다. 화살의 크기가 1척 8촌이라 하므로 1척은 약 35.6cm가 되고 1푼은 3.56cm된다. 삼한시대에 발굴되는 화살의 크기는 71.5cm~87cm이다. 평균 79cm이므로 1척은 약 43.9 cm가 된다.

 

과하마는 조랑말보다도 작은 말로 제주마라고도 하는데 어깨 높이가 113cm정도이다. 1척은 37.7cm가 된다. 주유국 사람의 키는 작기 때문에 기록한 것 같다. 평균키를 145cm로 간주할 경우 1척은 36.3cm가 된다.

 

추정에 사용된 자료가 객관성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당시 척의 길이는 1척이 35.6cm인 고구려척에 가장 가깝다. 이 책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魏)나라 때 대방군의 입장에서 살핀 것으로 되어 있다. 『후한서동이열전(後漢書東夷列傳)』에 '한(漢)나라가 중흥한 뒤로부터 사이(四夷)의 빈공(賓貢)이 때에 따라 어기거나 반(叛)함은 있었으나 사자(使者)와 통역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풍속과 풍토를 대략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 특하고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을 쓰기 이전에 동이족(東夷族)의 풍습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었다. 진수가 이 책을 작성할 때 이러한 기록을 저본으로 하였을 것이다. 1세기 초 한나라를 공격할 정도로 강성했던 고구려는 당시 한반도의 맹주였고 한(漢)과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어 접촉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척도로 독자적인 고구려척이 삼한(三韓)이나 주변 부족국가에 전달되었을 개연성을 더 높여 주고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척도(尺度)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척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조차도 척의 크기가 다르다. 삼국 중에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침몰 시킬 원인을 제공할 정도로 가장 강성했다. 길이가 35.6cm인 고구려척(高句麗尺)이 2000년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하고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발굴되었다.

 

이 척( 尺)이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고,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구조물 실측을 통해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에서도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 '고려척(高麗尺)'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야마토시대의 건축물 축조에도 기준척이 되었다. 이 척이 상당히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소척(唐小尺)의 1.2가 당대척(唐大尺)이 되고 당대칙(唐大尺)의 1.2가 고구려척(高句麗尺)이 된다.

 

고구려의 정릉사(定陵寺), 안학궁(安鶴宮), 평양성 외성(平壤城 外城), 장천1호분(長川1號墳), 모두루총(牟頭婁塚), 무용층(舞踊塚), 이성산성(二聖山城)의 성지(城池), 신라의 황룡사(皇龍寺) 금당과 탑, 백제의 부여 정림사(定林寺) 5층석탑, 일본의 법륭사(法隆寺), 사천왕사(四天王寺)의 회랑(回廊)과 강당(講堂) 등은 실측을 통해 고구려척(高句麗尺)을 사용하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백제는 다양한 척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2년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제428호) 연못터에서 대나무 자가 발굴되었다. 이 척은 백제가 중국 남조(南朝·420~589)와 교류가 활발했던 웅진·사비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25cm 정도의 남조척(南朝尺)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척을 당시 고분 조성이나 각종 유물 제작에 사용된 실물자료로 보고 있다. 공주 송산리 6호분, 무령왕릉 등 웅진기 전축분(塼築墳), 부여의 백제 고분, 백제금동대향로, 창왕명석조사리감, 능산리절터, 궁남지 출토 목간 등은 남조적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백제는 한성기에 낙랑군에서 들어온 23.7cm의 후한척(後漢尺)을 사용하다가 웅진·사비시대에 중국 남조척으로 변경했으며, 다시 사비시대 말인 무왕(武王) 후반대에 이르러 29.7cm의 당대척(唐大尺)을 받아들였다고 추정하는 학자가 있다.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은 딩대척이 사용되었다.

 

신라왕경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으로 삼국사·삼국유사(三國史·三國這事)에 나타니는 1보(步)는 1.60m, 1척은 26.7cm로 고한척(古韓尺)을 사용했음을 밝혀냈고 607년 창건된 일본의 금융사도 고한척(古韓尺)을 사용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탈해왕 키 9척, 아달라 이사금 키 7척, 실성왕 키 7척 5촌, 법흥왕 키 7척, 진덕왕 키 7척, 고구려 고국천왕 키 9척, 안원왕 키 7척 5촌, 흑치상지 키 7척, 백제 구수 왕 키 7, 무령왕 키 8척이라고 한다. 지나치게 키가 큰 탈해왕과 고국천왕을 제외할 경우 평균키는 7척 2치 5푼이다. 한척(漢尺)을 사용했다고 할 경우 평균키는 167.48cm, 주척(周尺)의 경우 138.48cm이다. 당시 남자의 평균키가 160cm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삼국시대에는 변형된 주칙(周尺) 또는 변형된 한척(漢尺)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증왕 13년에 '우산국은 명주(滨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 울릉도의 둘레는 56㎞이므로 1리는 약 560m가 된다. 동서와 남북의 거리로 보면 최대 24㎞이다. 1리는 약 240m가 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서는 '우릉도(于陵島) 둘레가 26,730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동서와 남북으로 46,000보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영양왕 19년 기록을 보면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중략)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라고 한다. 시작점과 종점을 잘 알 수 없지만 살수(청천강) 하류에서 압록강 하류까지 대략 120㎞내외 정도이다. 1리는 약 266m가 된다.

 

표본수가 적어 오차는 상당히 클 것으로 보이지만 삼국시대 1리의 크기는 삼한시대에 비해 길어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척은 나라마다 그 길이가 다르고 같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척도를 사용한 것 같다. 삼국시대에도 리 (里), 보(步), 척(尺)의 관계를 살펴보기는 어렵다. 특이한 점은 통일신라 이전까지도 고구려척이 신라와 백제에 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척도(尺度)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우리나라 어느 왕조보다도 중국과 조공무역을 활발히 전개한 나라다. 이로 인해 당나라의 많은 문화가 전달된다. 당나라의 척도인 당대척(唐大尺)이 이 시대에 거리와 길이를 재는 기준척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로 당대척이 도입되어 사용된 흔적은 석굴암과 불국사 석가탑과 첨성대 등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석굴암 건설의 당대척은 29.706cm, 불국사 석가탑 건조의 당대척은 30.024cm이다. 고려 문종 때도 당대척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데 미곡용(米斛用) 표준 양기를 제작하는데 사용된 당대척 길이는 29.601cm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성덕왕 18(719년)때 축조된 감산사(山寺)에 대해 '서울 동남쪽 약 20리' 라고 되어 있다. 현재 반월성(신라 왕성)에서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감산사까지 거리는 약 12.5km이므로 1리는 625m가 된다. 또 원성왕(재위: 785~798년)때 세운 절인 무장사(藏寺)에 대해 '서울 동북쪽 20리쯤 이다'라고 한다. 반월성에서 경주시 암곡동 무장사지3층석탑이 있는 곳까지 약 13km이므로 1리는 650m가 된다.

 

1리는 360보이고 1보를 6척(자)으로 볼 경우 감산사의 경우 1척은 28.94cm(625m ÷ 360 ÷ 60.2894m)이고 무장사의 경우 30.09cm (650m ÷ 360 ÷ 60.3009m)이므로 이를 평균하면 29.52cm가 된다. 물론 오차는 크게 발생할 수도 있지만 당시 척도로써 당대척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더 높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척도(尺度)

고려시대의 도량형은 정종(靖宗) 6(1040년) 유사에게 명하여 권형(權衡)과 평두량(平斗量)을 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때 새롭게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비탕으로 정종 12년에는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중앙의 경시서와 지방의 계수관에서 도량형기를 검사하여 부정행위를 방지하였다. 고려시대의 척의 길이는 통일신라시대 당대척보다 약간 늘어난 약 31cm로 송척(宋尺)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기 금석문 자료인 청주 '용두사 당간기(龍頭寺幢竿記)'에 30段(1단=63cm)의 절통으로 60尺의 기둥을 세웠다는 것과 '太平十年銘鐘(현종 21, 1030)'에 종의 높이가 2尺4寸2分(74.2cm)이라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들의 기준척이 각각 31.5cm와 30.66cm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현존 건축물인 부석사의 조사당, 봉정사의 극락전, 수덕사의 대웅전, 강릉의 객사문 등의 실측에 의하면 기준척이 모두 약 31cm이고, 북한지역에 있는 고려유물인 개성 만월대, 장안사 대웅보전, 개성 현화사 7층 석탑 등에도 31cm의 기준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미10년(1019년) 기록을 보면 '신유일에 소손녕(蕭遜亭)이 신은헌(新恩縣)에 이르니 서울과의 거리가 백리(里)였다'라고 하고 있다. 신은현은 오늘날 황해북도 신계옵이며 서울은 개성이다. 거리가 대략 65km 내외다. 1리는 약 650m가 된다. 1리를 360보로 보면 1보는 1.8m이고 1보를 6척으로 볼 경우 1척은 30cm가 된다. 오차범위 내에서 당대척 또는 송척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척도(尺度)

조선은 세종대왕 때에 길이 부피 및 무게뿐만 아니라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해시계와 같은 독자적인 도량형기를 개발하였다. 조선 후기 고종(高宗) 때에는 궁내부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여 도량형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여 도량형 제도를 법제화했다. 사서에서 척도에 대한 기록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권6 공전 도량형, 그리고 동일한 내용이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제1권에도 나타난다. 대상에 따라 다양한 척을 사용했다.

 

척도의 제도는 10리(釐)가 1푼(分)이 되고 10푼이 1치가 되고, 10치가 1자(尺)가 되고 10자가 1장(丈)이 된 다. 주척(周尺)을 황종척(黃鍾尺)과 비교하면 주척의 1자가 황종척의 6치 6리에 해당하고, 영조척(營造尺)1자는 황종척의 8치 9푼 9리에 해당한다. 조례기척(造禮器尺) 1차가 황종척의 8치 2푼 3리에 해당하고, 포백척 (布帛尺) 1자는 황종척의 1차 3차 4푼 8리에 해당한다.'라고 하고 있다.

 

즉 1자(척) = 10치(촌) = 100푼(분) = 1000리(釐) = 0.1장(丈)이다. 주척 1자 = 황종척의 0.606, 영조척 1자 = 황종척의 0.899, 조례기척 1자 = 황종척의 0.823, 포백척 1자 = 황종척의 1.348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오례(世宗五禮)/길례서례(吉禮序例)에 조례기척도(造禮器尺圖)가 실려 있는데 이를 미터법으로 측정한 값은 정족산본은 28.67cm이고 태백산본은 28.93cm로 약간 오차가 있다.

 

실측을 기준으로 조례기척을 역산해 보면 세종 측우기 석대(1441년) 주척 20.82cm(조래기척 28.28cm), 원각 사지10층석탑(1467년) 영조척 31.22cm(조례기척 28.58cm), 원각사지 대원각비(1471년) 영조척 31.19cm (조례기척 28.55cm)으로 조례기척 평균은 28.47cm으로 정족산본에 더 가깝다.

 

실측한 조례기척을 기준으로 황종척 1자을 계산해보면 34.6cm(28.47-0.823)가 된다.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는 황종척의 사각유척 2개는 어느 시기에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반척이 171.76mm, 173.04mm로 측정되었는데 이를 통한 황종척의 길이는 각각 343.52mm, 346.08mm이다.

 

실측한 조례기척을 각각 도기에 대입해 보면 주척 1자 20.9cm, 영조척 1자 31.1cm, 포백척 1자 46.6cm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약간씩 오차가 있을 것이다. 손가락 한마디, 한 뼘, 한 보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정확한 기준을 인위적으로 정하더라도 그러한 척도를 당시 오차 없이 대량 생산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용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어떤 목적물에 어느 척도가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황종척(黃鍾尺)은 궁중악기 제작에 사용하였고 주척(周尺)은 주로 거리를 재는데 쓰였으며 영조척(營造尺)은 구조물 또는 건축물에 사용되었다. 조례기척 (造禮器尺)은 의례용 예기를 제작하는 데에 그리고 포백척(布帛尺)은 옷감을 재는데 사용되었다.

 

성종 12(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저본으로 1530년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이후 편집된 책이다. 세종이 반포한 도량형이 적용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제24권 '영해도호부'편에서 거리를 측정하는데 사용한 리(里)에 관한 언급 중에 현재의 위치를 확인 가능한 기록을 발췌해 보면

 

당시 영해도호부의 치소가 있는 곳은 현 영해면사무소이다. ①'동쪽은 해안까지 7리'라고 한다. 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해안은 현 사진2리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까지 거리는 약 2.9㎞이다. 1리는 414m이다. ② '함한동(含恨洞)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그 동중(洞中)에 연지계(燕脂溪)가 있으니 관기(官妓)들이 사는 곳이다.'라고 한다. 함한동은 현 영덕기상관측소가 있는 골짜기다. 동중에 개울이 흐른다 하므로 계곡 중간지점 정도 될 것이 다. 부에서 이곳까지 거리는 약 1km이다. 1리는 333m이다.

 

③'축산도(丑山島) 부의 동쪽 1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현재는 매립하여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축산등대가 있는 곳이다. 약 5km로 1리는 500m가 된다. ④'관어대(觀魚臺) 부의 동쪽 7리에 있다.'라고 한다. 관어대는 송천강 하류 대진해수욕장 입구 주변 상대산 북측 절벽위로 3.2km이다. 1리는 457m이다. ⑤무가정(無價亭) 부의 성(城) 동쪽 3리에 있다.'라고 한다. 무가정은 현 괴시리 마을이 있는 곳으로 이색 선생의 출생지이다. 목은 선생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부에서 1.2㎞로 1리는 약 400m가 된다.

 

⑥경정(景汀)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한다. 오늘날 위치는 경정1리로 추정된다. 부에서 이곳까지 6.3㎞정도 이므로 1리는 420m가 된다. ⑦'백석정(白石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고 한다. 현 백석리에 있는 병곡항주변으로 추정된다. 이곳까지 9.8km로 1리는 490m가 된다. ⑧'병곡포(柄谷浦)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병곡역(柄谷驛)의 옛터가 있다.'라고 한다. 『해동지도』을 보면 당시 병곡역은 현재의 영1리와 영2리 사이 하천 주변이고 병곡포는 이 명칭을 딴 것으로 보이므로 그 주변에 포구가 형성될 만한 곳은 고래불해수욕장 북쪽 끝자락인 현 병곡면사무소가 위치한 마을로 추정된다. 이곳까지 약 7.2㎞이며 1리는 592m가 된다.

 

발췌한 자료에서 5리 이내는 오차발생이 크므로 제외하고 영해도호부에서 병곡포(柄谷浦)까지 거리 기록은 백석정(白石汀)까지의 거리 기록과 비래관계가 맞지 않으므로 오류인 것 같다. ②,③,⑧을 제외하고 5곳에 대한 1리의 평균치는 456.2m가 된다. 1리는 360보이고 1보가 6척이라면 1척은 약 21.1cm가 된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당시 거리를 재는데도 주척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통일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은 1474년 1월 1일(음력) 반포되었다. 이 이후로는 길이를 잴 때 이 기준을 적용한 듯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조 16년(1740年)의 내용이 기록된 「국조보감(國朝寶鑑)」 제62권을 보면 세종 28년(1446년) 12월에 황종척(黃鐘尺)·영조척(營造尺)·예기척(禮器尺)·주척(周尺)·포백척(布帛尺)을 제작하였으나 전해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척부에서 포백척(布帛尺)이 발견되어 현재의 포백척(布帛尺)과 비교해 보니 1치~5분 정도 작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그동안 척도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약간의 범위 내에서 차이가 있었다. 당시 세종때 표백척 1자는 46.6cm이므로 현재의 표백척 1자는 2.33cm~4.66cm정도 더 크다.

 

현재 여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척의 길이를 평균해 보면 황종적 1척 = 34.6cm, 주척 1척 = 20.0cm, 영조 척 1척 = 30.3cm, 예기척 1척 = 27.7cm, 포백척 1칙 = 49.1cm 이고 길이가 똑 같은 적은 없다. 포백척은 영조 16년(1740年) 이전의 것이고 나머지는 언제 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세종대의 척과 비교해 보면 최대 ±0.9cm 범위에서 오차가 있다.

 

개항 이후의 척도(尺度)

개항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하여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하여 미동법(米突法)이란 이름으로 미터법을 일부 채택하고 1905년 3월 21일(광무 9년)에 이것을 바탕으로 도량형법을 정하였다. 도량원기를 백금으로 만들어 섭씨온도계의 눈금을 새겼고 15℃의 길이를 10/33척으로 하였다. 1m는 3.3척이고 1척은 0.30303m이다.

 

호(豪)를 최저 단위로 하고 10호=1리, 10리=1푼, 10푼=1치, 10치=1자, 10자=1장, 1,386자=1리(里)의 단위 명칭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미터법이 국가 공식 도량형으로 완전히 정착되기는 1964년이었다. 1959년에는 국제미터협약에, 1978년 국제법정계량기구에 가입함으로써 현대적인 계량제도를 마련하여 선진국과 같은 계량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미터법은 1799년 프랑스에서 제정되었는데 기준은 지구의 자오선 길이 4천만분의 1을 1m로 정했다.

 

길이를 재는 척도인 자(尺)의 변화를 시대별 왕조별로 구분해 보았는데 척의 변화를 획일적으로 그렇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 시대에 주로 어떤 척을 사용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자료와 문헌을 참조하였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유물로 발견되는 척은 같은 척이라도 길이가 오차 없이 같지는 않다.

 

크고 작고, 많고 적고, 무겁고 가벼운 것을 알아내는 것은 사람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신체를 이용한 측정은 편리하고 단순한 방법이지만 자세한 차이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의 신체에 근거한 척도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 척도는 길이가 들쑥날쑥하여 불편이 있었을 것이다. 도구의 통일은 공동체 집단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공동체간으로 번져나갔을 것이다. 치자(治者)의 입장에서 수취체제의 형평과 백성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도량형(度量衡) 통일에 개입하게 된다.

 

한대(漢代)부터 당대(唐代)까지 증보된 『예기(禮記)』에서는 '이전에 주척 8척이 1보이고 지금은 주척 6척 4이 1보'라고 한다. 현재 나타나는 자료를 볼 때 거리를 재는 척도인 리(里)와 보(步) 그리고 길이를 재는 척도인 척(尺)과의 관계는 통일신라 이전까지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1리=360보, 1보=6척(당대척)인 관계는 통일신라에서부터 나타난다. 1척=10촌인 관계는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보이는데 이 책에는 푼(分)에 관하여도 기록하고 있어 1척=10존=100푼인 관계는 이 당시에도 성립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지위서등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 『경국대전(經國大典)』 제6권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제1권
  • 「국조보감(國朝寶鑑)」 제62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네이버 지식백과] 도량형 [度量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塔像 第四)
  • 삼국사기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三國史·三國遺事》 記事에 의한 新羅王京復元과 古韓尺 2002년 Arai Hiroshi
  • 朝鮮前期 度量衡制 研究 2001년 李宗峯
  • 한수당연구자료집 제199권, 한상복 1997